-발 끝만으로 시작되는 품격의 질주
-스포티함 대신 우아함에 초점 맞춰
일본 치바현 최남단에 위치한 마가리가와 서킷. 한참 동안 삼나무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도착한 이곳의 고요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오롯이 '몰입'을 위한, 마치 수도원 같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괴물, 롤스로이스 블랙배지 스펙터를 만났다.
정차해있는 차에 다가가니 낮고 넓게 깔린 차체가 마치 주변 공기마저 흡수하는듯한 중력을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두드러지는 특유의 웅장함 비율에 23인치에 달하는 휠, 단단하게 다져진 숄더라인은 단순히 정차해 있는 것 만으로도 힘과 아름다움, 균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면부에서는 블랙 배지 전용으로 제공하는 아이스 블랙 보닛이 시선을 끈다. 실버, 블루, 다크 톤과 같은 클래식한 롤스로이스 컬러도 아닌 오직 블랙 배지 스펙터만을 위한 컬러다.
그릴은 기존의 크롬 대신 다크 크롬으로 시각적 중량감과 근엄한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한다. 내부에는 조명을 숨겼고 야간에는 마치 은은한 오로라처럼 그릴을 감싼다. 총 4가지 컬러를 선택할 수 있어 외관과의 조합을 따져보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실내는 더욱 놀랍다. 기존 우드 베니어 대신 블랙 배지 전용으로 적용된 테크니컬 파이버가 대시보드를 감싸며 미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한 소재 교체가 아닌, 질감과 광택, 반사각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정밀성이 녹아든 표현이다. 도어 트림에는 수천 개의 광섬유가 심어진 스타라이트 도어 패널이 자리한다. 실내 전체가 별빛에 휩싸인 듯한 감각은, 단지 호사스러움을 넘어서 공간을 재해석한 결과다.
계기반의 인스트루먼트 다이얼 역시 정적인 디자인에 머물지 않는다. 조작에 따라 그래픽이 미세하게 반응하며 퍼포먼스 주행 시에는 출력과 토크의 흐름이 실시간으로 시각화된다. 하나하나의 요소가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품격을 놓치지 않는 방식. 고성능을 추구하면서도 한 치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태도는 그 어떤 퍼포먼스 브랜드보다도 운전자를 자극한다.
블랙 배지 스펙터의 공차 중량은 2,890㎏에 달하지만 이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압도적인 전기모터의 즉각적인 반응성을 갖고 있다. 685마력에 달하는 최고출력과 91.8㎏·m에 달하는 최대토크 덕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는 단 4.5초만에 주파한다.
롤스로이스 특유의 매끄러운 승차감과 결합된 전기 파워트레인의 정숙함은 기존 고성능 전기차들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을 전달한다. 전반적인 가속 과정이 모두 매끄럽다. 반복되는 코너에서도 그 무거운 덩치에 허둥대지 않으며 품위있는 자세를 유지한다.
진짜 감탄은 스피리티드 모드에서 나왔다. 브레이크 페달을 꾹 밟고, 동시에 가속 페달을 깊게 누르면 차체가 꿈틀거린다. 넘치는 출력을 억누른 채 전진을 참는, 품격 있는 괴력의 떨림이다.
그리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 이 거대한 쿠페는 마치 벼르고 있던 에너지를 폭발시키듯 매서운 속도로 튀어나간다. 3톤에 달하는 몸체는 무게를 무시하듯 공간을 가른다.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의 질량 이동이다.
여느 고성능차처럼 스포츠 모드를 누르고, 자세 제어장치를 해제하고, 배기 플랩을 열고, 감쇠력을 조정할 필요도 없다. 스피리티드 모드는 버튼 하나 없이 발끝의 압력만으로 시작된다. 운전자의 품격을 흩트릴 수 있는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그저 고요 속에서 출력을 다룬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도 차는 품격을 잃지 않는다. 그 폭발적인 가속력 속에서 문득 보닛 끝단에 단정히 서 있는 환희의 여신상을 바라보게 된다. 온몸으로 중력을 밀쳐내며 튀어나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우아한 자세를 유지한다. 그 모습은 마치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함선의 선수를 장식한 조각처럼 보였다.
인피니티 모드에서는 다이얼이 미세하게 떨리고, 출력의 흐름이 빛처럼 흘러간다.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클러스터는 마치 빛의 분광 현상 처럼 정말 빠른 어떤 존재가 시야를 스쳐 지나갈 때 잠시 남기는 궤적 같다.
전통적인 엔진 사운드의 비명을 대신해 우주에서 들려올 법한 전기적 속삭임이 조용히 실내를 채운다. 이토록 강력한 움직임조차 소리 대신 진동과 빛으로 전달되는 곳. 시간과 중력이 왜곡된 듯한 그 찰나의 몰입은, 블랙배지 스펙터만이 열어주는 우주의 문과도 같다.
마가리가와의 고요함과 블랙 배지 스펙터의 폭발적인 움직임. 이 둘의 대비는 너무도 이질적이지만 그 조화야말로 이 차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우아함과 무게, 질량과 가속, 별빛과 어둠, 그리고 운전자라는 중심축. 블랙 배지 스펙터는 그 모든 모순된 요소들을 품격이라는 언어로 매끄럽게 엮어냈다.
일본(치바)=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