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원팀’이 일궈낸 라 사르트의 태극기
-경영진·모터스포츠법인·남양연구소 ‘원팀’
-WEC 진출 선언 이후 557일 만에 르망 24시간 완주
“도전해야 변할 수 있고 바뀌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지난 2015년 11월 대한민국 최초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제네시스 출범식에서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의 발언이다. 제네시스가 내구 레이스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수 있던 힘도 이 도전 DNA에서 나왔다. 제네시스가 도전 DNA로 써낸 499일간의 뜨겁고 숨 가쁜 여정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24년 12월4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제네시스가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이하 WEC) 하이퍼카 클래스 참가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내구 레이싱 전담 부서조차 없던 제네시스는 단 499일 만인 2026년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WEC 개막전 ‘이몰라 6시간’에 직접 개발한 ‘GMR-001 하이퍼카’로 데뷔해 #17 및 #19 차 2대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더 나아가 557일이 지난 2026년 6월14일(현지시간)에는 GMR-001 하이퍼카 #19 차가 프랑스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내구 레이스 ‘르망 24시간’에서 완주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는 대한민국 브랜드 최초의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클래스 출전이자 완주이다. 제네시스가 499일 만에 WEC에 데뷔하고 557일 만에 ‘대한민국 최초’라는 역사를 쓸 수 있던 배경에는 현대차그룹이 ‘원팀’으로 역량을 한데 모은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2024년 12월 제네시스의 모터스포츠 진출 계획을 발표한 현대차그룹 CDO(글로벌 디자인 본부장) 겸 CCO(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루크 동커볼케 사장은 “최고 경영층에게 제네시스의 내구 레이스 참가를 제안하고 얼마 안 돼 ‘해보자’는 답을 받았다”며 “이 속도감이 우리가 가진 ‘하이퍼스피드 정신’”이라고 밝혔다.
루크 동커볼케 사장의 도전적인 제안, 그리고 그 이전부터 제네시스 브랜드의 확장과 모터스포츠 진출에 대해 고심해왔던 최고 경영층의 도전 DNA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역사적인 ‘하이퍼스피드 프로젝트’가 출발할 수 있었다.

특히, 루크 동커볼케 사장은 “최고 경영층이 레이스 참가의 목표를 '기술과 내구성 등 모터스포츠의 교훈을 통해 고객에게 더 나은 차를 만드는 것'이라고 명확히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모터스포츠가 천문학적인 예산과 인력 투입이 필요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고객을 위해 내구 레이스 진출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실제로 정의선 회장은 일찍이 고객을 향한 고성능 기술의 전략적 가치를 강조해왔다. 2018년 CES 현장에서 고성능차의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 “마차를 끄는 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싸우거나 잘 달리는 경주마도 필요하다. 고성능차에서 획득한 기술을 일반차에 접목할 때 시너지 효과가 크기 때문에 현대차에 꼭 필요한 영역”이라고 답했다.
시릴 아비테불 현대모터스포츠법인장 겸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총감독은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과 실행력 덕에 트랙 안팎에서 동시에 성장할 수 있었다”라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하이퍼스피드’”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트 추진을 결정한 직후, 제네시스는 조직 구축과 차 개발을 동시에 착수했다. 먼저, 자체 신생 팀인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을 구성했다. 일반적으로 완성차 브랜드가 모터스포츠에 진출할 때 기존 레이싱 팀을 그대로 인수하거나 외주 운영팀을 활용하는 것과 다른 방식이었다.
자체 팀을 꾸린 제네시스는 엔지니어와 드라이버 역량을 키우기 위해 프랑스의 명문 레이싱 팀 ‘IDEC 스포트’와 손잡고, 2025년 유러피언 르망 시리즈(ELMS) LMP2 클래스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 내구 레이스 운영 노하우와 기술 데이터를 축적하고 드라이버들의 기량을 끌어올려 2026년 WEC 하이퍼카 클래스 데뷔를 위한 토대를 다졌다.
제네시스가 ‘하이퍼스피드’를 강조했지만 모터스포츠는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경쟁력 있는 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리고 파워트레인까지 자체 개발하려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존 강팀이 수십년 동안 쌓아 온 경험을 짧은 기간 안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차그룹 장재훈 부회장은 속도감 있는 개발을 위해 그룹이 기존에 보유하던 기술 자산이자 이미 수년 간 검증을 마친 WRC 엔진을 전혀 새로운 WEC용 엔진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특히,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과 현대모터스포츠법인, 남양연구소의 협업이 원활히 이루어져 ‘원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역할과 자원을 배분하고 공동 기술 개발을 위한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5월에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간을 내 프랑스 르 카스텔레 지역에 위치한 GMR 워크샵을 직접 찾아 1호 섀시(차체)를 비롯한 엔진 및 차 개발 현황을 꼼꼼히 챙기고 엔지니어 등 현장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이런 경영진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과 현대모터스포츠 법인, 남양연구소는 2024년 6월부터 WEC 엔진 공동 개발에 나섰고 현대차의 WRC 출전 차에 탑재하던 1.6L 터보 직렬 4기통 엔진 두 개를 결합해 WEC를 위한 'G8MR 3.2L 터보 V8’ 엔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G8MR 3.2L 터보 V8 엔진은 현대차그룹이 개발한 모든 파워트레인 중 가장 강력한 출력을 가진 엔진이다. 이론상으로는 최대 900마력의 힘을 내는 게 가능한 것으로 파악됐다. 또 같은 조건의 양산 엔진 대비 중량이 수십 kg가량 가벼워 차의 무게를 극한으로 낮추는 레이스 환경에 최적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체 엔진을 개발하려는 이 같은 노력은 8개월 만인 2025년 2월 첫 시동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후 각종 테스트 등 5개월간의 담글질을 거쳐 해당 엔진은 섀시와 결합, 하이퍼카를 구동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울러 엔진 내구성, 냉각 성능, 야간 주행 시스템, 타이어 관리 성능 등을 분석하고 차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도 이어졌다. 무려 2만5,000km에 달하는 신뢰성 검증을 거쳐 지금의 GMR-001 하이퍼카를 완성했다. 엔진을 개발하는 동안 부품 파손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남양연구소는 최정예 엔지니어를 프랑스로 긴급 파견해 현장에서 직접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까지 함께 제시했다.

시릴 아비테불 총감독은 검증된 엔진을 하이퍼카 엔진 개발에 활용한 것에 대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기술과 노하우를 토대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라고 밝혔다.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의 프랑수아 자비에 드메종 기술 총괄은 “엔진 핵심 부품 설계, 검증, 생산에는 수년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간 내에 완전히 새로운 엔진을 처음부터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WRC 차의 엔진은 이미 검증된 만큼, 최대한 많은 부품을 공유하는 것이 논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차 CEO 호세 무뇨스 사장의 지원도 힘을 더했다. 호세 무뇨스 사장은 모터스포츠 진출이 유럽과 북미 시장에서 제네시스의 인지도를 높이고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라고 판단했다. 당장 수익이 나지 않고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가치있는 투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호세 무뇨스 사장은 르망 24시간이 열리는 현장을 찾아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르망 24시간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출전을 결정했다”며 “WEC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브랜드 인지도 측면에서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이 13개월 만에 하이퍼카 구동에 성공하고 499일 만에 데뷔를 이뤄낸 배경에는 현대차그룹이 지난 13년 이상 쌓아온 모터스포츠 기술력과 노하우가 있었다.
정의선 회장은 2011년 11월 LA 오토쇼에서 “브랜드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을 계획하고 있고, WRC를 비롯해 국내외 모터스포츠에 대한 투자 강화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브랜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모터스포츠 재진출 가능성을 언급했다.
정의선 회장이 WRC 복귀 의지를 시사한 이후 2012년 12월, 현대차그룹은 독일 알체나우에 모터스포츠 전담 부서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을 설립하고 11개국 출신의 사내 전문가 50명을 고용해 전담팀을 꾸렸다. 이후 현대차그룹은 2003년 철수한 지 11년 만인 2014년 시즌부터 WRC에서의 질주를 이어오고 있다.
이어 현대차는 서스펜션, 제동 시스템 등 모터스포츠를 통해 획득한 각종 고성능 기술력을 바탕으로 2015년 고성능 브랜드 ‘현대 N’을 출범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의선 회장은 BMW의 고성능 라인업 ‘M’ 개발을 주도한 알버트 비어만 전 사장을 직접 영입하고 남양연구소와 유럽연구소에 고성능차 개발 전담부서 신설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고성능 역량 강화를 위한 기반을 직접 마련했다.
이처럼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하이퍼스피드’ 성과는 현대모터스포츠법인 설립 이후 13년 이상 쌓아온 현대차그룹의 모터스포츠 분야 헤리티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모터스포츠 진출을 선언한 지 556일 만인 지난 6월13일, 대한민국 브랜드 최초로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클래스에서 레이스를 시작했다.

공식 경기 시작 전 모든 팀과 드라이버, 엔지니어 등이 차량 앞에 일렬로 정렬하고 각 제조사의 국기가 그리드 위에 펼쳐지는 ‘출발 세리머니’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라 사르트 서킷에 등장했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556일 동안 만들어 온 역사가 단순한 레이스 참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과 브랜드의 존재감을 세계 무대에 각인시키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 556일 동안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과 현대모터스포츠법인, 남양연구소 관계자들은 거의 매일 화상회의를 통해 머리를 맞대며 개발 현황과 각종 데이터,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꼬박 하루동안 달리는 르망 24시간의 혹독한 레이스가 사실상 수백일동안 숨가쁘게 이어져 온 것이다.
하루 뒤인 6월14일,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르망 24시간 경기 완주에 성공했다. 현대차그룹의 역량을 집중해 함께 완성한 GMR-001 하이퍼카 #19 차량은 라 사르트 서킷을 총 372바퀴, 5068km 달렸다. 단 하루 만에 서울과 부산을 6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달린 것이다.
시릴 아비테불 총감독은 경기 직후 “첫 르망 24시간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며 “레이스 기간 내내 강력한 잠재력을 드러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회복력과 침착함, 팀워크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차 두 대 중 #19 차는 르망 24시간 완주에 성공했지만 함께 출전한 #17 차는 레이스 종료를 7시간 반 남겨둔 시점에서 서스펜션 이상으로 리타이어했다.
현재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서스펜션 이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으며 시즌 후반 레이스에서 이를 개선한 업그레이드를 단행할 계획이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의 목표는 레이스 서킷 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정의선 회장은 2024년 11월 WRC 일본 랠리가 열린 나고야에서 "스포츠가 항상 승패가 있는 거니까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다"라며 “좋은 성적은 우리가 자동차를 열심히 연구하고 잘 만들어내는 데 힘을 주는 것 같다”고 밝혔다. 승패에 연연하기보다는 새로운 기술을 연구·개발하는 것이 모터스포츠 참가의 목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호세 무뇨스 사장도 “내구 레이스에서 쌓은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이를 차 개발에 적용하고 있다”며 “단계적으로 겸손하게 노력하다 보면 나중에 실적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현대모터스포츠법인은 서킷에서 생성되는 극한의 차량 데이터를 현대차그룹 AVP본부와 공유하는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구성해 모든 현대차 엔지니어가 자유롭게 이 데이터에 접근하고 이를 기반으로 양산 차를 개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차그룹은 내구 레이스를 통해 고객을 위한 더 나은 차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서킷 위에서의 '원팀'을 넘어, 고객을 위한 '원팀'을 만드는 것이 바로 '하이퍼스피드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