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12의 여유, 정제된 충격까지..SUV의 한계 넘어서
-흔들리지 않는 품격, 험로에서도 일관된 성능 보여줘
그 자체로 진귀한 경험이었다. 세상에 누가 롤스로이스로 오프로드를 달릴 생각을 할까.
블랙배지 컬리넌 시리즈 II를 비포장길 앞에 세워뒀을 때만 해도 전혀 믿기지 않았다. 가능한걸까. 괜찮은걸까. 흠집이 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약간이 죄책감과 쓸데없는 걱정들이 생각을 에워쌌다.
그러나 주행이 시작되자 이런 생각들은 단숨에 사라졌다. 블랙배지 컬리넌은 태연했고 노면은 차의 움직임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V12 엔진의 낮고 묵직한 음색은 깊이를 더하고 에어 서스펜션은 무게 중심을 조율하며 노면의 거친 입자 하나하나를 걸러냈다.
오프로드에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냥 일반 도로를 달리는 것과 똑같이 느껴져 당황스럽다. 차가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이는지 기사를 쓰기 위해 치열하게 느껴보고 고민해봐야했지만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세상에 어떤 사람이 롤스로이스로 오프로드를 갈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현장에 동행한 롤스로이스 관계자의 말은 달랐다. 중동에서는 컬리넌을 몰고 사막의 모래 언덕을 오르는 소비자들도 있단다.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지만 그 순간 만큼은 사실로 느껴졌다. 롤스로이스는 늘 길 위에서 당당함과 일관된 승차감을 보여주는 차다. 그런데 길이 아닌 곳에서 조차 우아함을 잃지 않다니. 롤스로이스의 능력이 여기까지 뻗쳐있을 줄은 몰랐다.
전장 5.7미터, 무게는 2.7톤이 넘지만 랜드로버나 지프의 오프로더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모글 코스를 잘도 넘어간다. 울퉁불퉁한 진흙길에서도 시트에 전해지는 감각은 놀라울 만큼 유연하고 부드럽다. 강력한 퍼포먼스를 자랑하면서도 탑승자를 끝까지 배려한다니. 완벽하다는 표현을 잘 하지 않으려 하지만, 여러모로 완벽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차 하부에서 자갈이 튕겨나가는 소리 마저 정제된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흙먼지로 가득한 바깥이었지만 실내는 여전히 차분했고 모든 진동은 순화돼서 전달됐다. SUV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나를 지키는 보호막 안에 있는 느낌이다.
로우 버튼을 체결하면 기어 변속 속도는 50% 빨라지고 배기음은 더욱 묵직해진다. 조금은 정제된 흙길에 접어들자 더 속도를 내도 괜찮다는 인스트럭터 말에 '에라 모르겠다' 하며 가속 페달을 짓이겼다. 여기서도 컬리넌은 헛바퀴 한번 돌지 않고 600마력에 이르는 출력을 온전히 뿜어낸다. 분명 흙길인데 일반적인 아스팔트 노면에서 가속하는 듯한 느낌에 또 한번 어이가 없었다.
이렇듯 컬리넌은 그 어떤 지형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오프로드에서도 품격을 유지하고 극한의 환경에서도 승객을 배려한다. 기교 없이 그냥 우직하게 길을 가로지르고 그 와중에 단 한 순간도 우아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SUV이기 이전에 롤스로이스라는 관계자들의 설명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짧은 오프로드 체험을 마친 뒤 흙투성이가 된 컬리넌을 보고 또 한번 헛웃음이 터졌다. 늘 반짝이는 모습만 봤는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진흙투성이가 된 휠의 모습이 제법 이질적이었다.
시승한 블랙배지 컬리넌 시리즈II의 시작가는 5억7,700만원이다.
일본(치바)=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