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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 EX90, 가장 조용한 볼보의 가장 큰 울림

입력 2026-08-07 00:00 수정 2026-08-07 08:50


 -680마력보다 오래 남은 25개의 스피커
 -애비 로드 스튜디오 모드가 완성한 플래그십의 품격
 -달리는 즐거움보다 듣는 즐거움이 컸다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는 1952년 세상을 당황하게 만든 작품 '4분 33초'를 발표했다.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지만 아무 음도 연주하지 않는다. 한참을 당황하던 청중은 그제야 공연장 안을 채우던 숨소리와 기침, 의자 끄는 소리, 바람 소리를 듣게 된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많은 소리를 품고 있다고 깨닫게 되는 셈.

 

 볼보 EX90을 시승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그 작품이었다. 전기차는 원래 조용하지만 EX90의 침묵은 목적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좋은 음악을 얹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680마력의 성능보다, 4.2초의 가속보다, 시승을 마친 뒤에도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음악 때문이었다. 

 

 ▲디자인&상품성
 EX90은 존재감을 과시하는 SUV가 아니다. 전장 5,040㎜에 달하는 차체를 가졌지만 화려한 캐릭터 라인이나 과장된 크롬 장식으로 시선을 끌려 하지 않는다. 대신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비례와 면으로 승부한다. 볼보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철학,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EX90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모습으로 구현됐다. 

 

 전면부는 기존 볼보의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미래지향적으로 다듬었다. '토르의 망치' 주간주행등은 이제 헤드램프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그래픽처럼 자리 잡았다. 시동을 켜면 좌우로 갈라지며 HD 픽셀 헤드램프가 모습을 드러내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막혀 있는 패널과 길게 뻗은 보닛은 볼보 특유의 묵직한 이미지를 잃지 않는다.

 

 측면은 군더더기가 없다. 차체와 완전히 맞닿는 플러시 도어핸들과 프레임리스 형태의 사이드 글레이징은 공기 흐름을 정돈하는 동시에 시각적인 깔끔함을 더한다. 거대한 차체임에도 무겁다는 느낌보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후면부 역시 볼보다운 절제가 이어진다. 수직형 테일램프는 기존 XC90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차체 양쪽 끝을 따라 길게 뻗은 램프와 리어 글라스를 감싸는 보조 조명은 야간에도 EX90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화려한 그래픽보다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집중한 모습이다.

 

 실내는 '자동차'보다 '공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14.5인치 세로형 디스플레이 하나가 중심을 잡고 9인치 운전자 디스플레이와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필요한 정보를 나눠 보여준다. 덕분에 대시보드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버튼은 대부분 사라졌고, 수평으로 길게 뻗은 우드 패널과 슬림한 송풍구가 실내를 한층 넓어 보이게 만든다.

 

 소재 역시 북유럽 가구를 연상시킨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우드 트림과 은은한 금속 장식, 나파 가죽은 화려함보다 편안함에 초점을 맞춘다. 3열 SUV답게 공간 활용성도 뛰어나다. 평평한 바닥과 전동식 3열 시트 덕분에 탑승과 적재 모두 부담이 없다.

 

 밤이 되면 EX90의 진가는 더욱 드러난다. 서울반도체의 '썬라이크(SunLike) LED'를 적용한 백라이트 우드 데코는 자연광에 가까운 빛을 구현한다. 조명의 밝기를 뽐내기보다 공간 전체를 은은하게 감싼다. 여기에 버튼 하나로 투명도를 조절하는 일렉트로크로믹 글라스 루프까지 더해지면 실내는 북유럽의 프리미엄 라운지에 가까운 분위기를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공간 연출이 다음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조용한 실내와 편안한 조명, 정숙한 주행 환경은 모두 오디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무대처럼 느껴졌다. EX90의 진짜 매력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성능
 시승차는 트윈 모터 퍼포먼스 울트라. 최고출력은 680마력, 최대토크는 81.1㎏·m에 달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는 4.2초면 충분하다. 대형 SUV라는 사실이 무색한 수치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여유다. 가속은 거침없지만 급하지 않다. 듀얼 챔버 에어 서스펜션은 노면의 잔진동을 대부분 걸러낸다. 차체는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고, 고속에서도 불안한 움직임이 없다. 운전자는 속도를 의식하기보다 공간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때서야 깨닫게 된다. EX90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가속도도, 에어 서스펜션도 아니었다. 오디오 시스템이었다. 볼보가 이렇게까지 정숙성을 높인 이유는 단순히 편안한 승차감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보면 누구나 단번에 깨닫게 된다. 

 

 25개의 독립 스피커와 헤드레스트 스피커,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 그리고 비틀즈의 수많은 명반이 탄생한 영국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와 공동 개발한 '애비 로드 스튜디오 모드'. 스펙만 보면 화려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자동차 안에서 음악이 어떻게 살아나는가다.

 

 한스 짐머가 작곡한 영화 'F1'의 메인 테마가 재생되는 순간이었다. 낮게 깔리는 신디사이저가 차 안을 천천히 채우고, 곧이어 현악기가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여기에 브라스와 타악기가 하나둘 겹쳐지며 음악은 서서히 속도를 높인다. 보통 자동차 오디오는 이쯤부터 저음이 부풀거나 악기들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한다.

 

 EX90은 달랐다. 첫 음부터 악기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자리를 갖고 있었다. 신디사이저는 실내 바닥을 따라 깊게 깔렸고, 현악기는 대시보드 위를 넓게 가로질렀다. 브라스가 힘 있게 치고 올라오는 순간에도 뒤편에서 리듬을 받치는 타악기의 결은 흐려지지 않았다. 저음은 귀를 압박하기보다 공간을 밀어냈고, 음악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차 안 전체를 하나의 공연장으로 바꿔놓았다.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을 비틀즈의 Come Together를 재생했다. 그리고 이 모든ㄴ 의외로 화려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저음을 키우거나 공간감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녹음실에서 엔지니어가 듣는 모니터 스피커처럼 담백하다.

 

 폴 매카트니의 베이스는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링고 스타의 드럼은 리듬을 또렷하게 끊어준다. 존 레논의 보컬은 악기 위에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서로가 앞으로 튀어나오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위치를 지키면서 하나의 음악을 만든다. 왜 이름이 '애비 로드 스튜디오 모드'인지 그제야 이해됐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신 K팝도 마찬가지였다. 에스파의 Lemonade를 틀었다. 전자음이 많은 음악은 자칫 저음이 과장되고 보컬이 묻히기 쉽다. 그러나 EX90은 신디사이저와 베이스, 코러스, 리드보컬을 층층이 쌓아 올린다. 소리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각자의 공간을 존중한다.

 

 개인적으로 자동차 오디오를 평가할 때마다 반드시 재생하는 곡이 있다. 서태지의 Moai다. 도입부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효과음부터 불규칙한 드럼 패턴, 깊게 깔리는 베이스, 신디사이저와 기타까지 자동차 오디오의 공간감과 분리도, 저역 표현력을 확인하기에 이만한 곡도 드물다.

 

 EX90은 기대 이상이었다. 물방울은 단순히 왼쪽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앞유리 바깥 허공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위치가 명확했다. 드럼은 복잡한 리듬 속에서도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베이스는 묵직했지만 다른 악기를 덮지 않았고, 신디사이저는 실내를 감싸면서도 기타의 결을 끝까지 남겨두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볼륨을 높였을 때였다. 좋지 않은 오디오는 볼륨을 키울수록 소리가 커지고 좋은 오디오는 볼륨을 키울수록 정보량이 늘어난다. EX90이 그랬다. 소리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들리지 않던 숨소리와 잔향, 현을 긁는 질감, 드럼 스틱이 심벌을 스치는 순간까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감는 순간 자동차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음악뿐이었다.

 

 ▲총평
 볼보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안전을 떠올린다. 전기차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폭발적인 성능과 정숙성, 그리고 주행거리를 말한다. 모두 맞다. EX90은 여느 볼보가 그랬듯 안전할 테고, 전기차이기에 정숙하고 폭발적인 성능을 갖췄다. 

 

 하지만 하루 동안 함께한 뒤에는 다른 문장이 먼저 떠올랐다. 가장 조용한 볼보가 가장 큰 울림을 남겼다는 것.  침묵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여백을 제공했다. 존 케이지가 침묵 속에서 새로운 소리를 발견했듯 볼보는 전기차의 정숙함 속에서 자동차가 줄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청음 경험을 완성했다.

 

 680마력은 언젠가 익숙해질 것이다. 4.2초의 가속도도 시간이 지나면 숫자로 남는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시동을 끄지 못하고 음악이 끝날 때까지 차 안에 머물게 만드는 경험은 오래 기억된다. 이게 바로 EX90이 보여준 플래그십의 품격이었다.

 

 시승한 EX90의 가격은 1억3,320만원이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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