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 사피엔스, 로보 에렉투스 등
‘호모(Homo)’는 사람을 의미한다. 호모 뒤에 개별 의미를 추가하면 인류를 정의하는 용어로 쓰인다. ‘사피엔스(Sapiens)’는 지혜로움을 의미하니 둘을 섞으면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발로 서서 걷는 인간이면 호모 에렉투스이고, 경제적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라 부르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근본적 이유는 사피엔스로 불리는 ‘지능’ 덕분이다.

그런데 인간보다 지능이 앞선 존재가 등장하려 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지능이다. 창조는 사람이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점차 인간 지능을 뛰어넘으려 한다. 그야말로 신인류다. 그리고 신인류는 인간이 아니기에 ‘호모’ 대신 ‘로보(Robo)’를 쓴다. 생각하는 로봇의 로보 사피엔스, 두 발로 직립 보행하는 형태라면 로보 에렉투스다. 인간과 다른 점은 딱 하나 감정 여부다. 하지만 감정도 과학의 영역에 포함되는 만큼 얼마든지 넣을 수 있다.
그리고 로봇이 인간 이동에 적극 활용되면 로보 모빌리티인데 이때 지능이 있으니 굳이 명칭을 붙이면 ‘로보 사피엔스 모빌리티’다. 여기서 충돌 지점이 생긴다. 인간 또한 스스로 의지를 가진 사피엔스인 탓이다. 이동 과정에서 인간 지능과 로봇 지능이 서로 갈등을 벌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기에는 선택권 주고받기로 갈등보다 협업을 추구한다. AI 스스로 판단이 애매할 때 인간에게 운전을 요구하고 인간은 받아들인다. 하지만 점차 고도화되면 인간의 조종 역할이 축소되고 로봇은 인간의 운전 능력을 믿지 않게 된다. 통계적으로 인간 운전 사고율이 로봇보다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보 모빌리티에게 주어진 최우선 명령이 인간 탑승자 보호라는 점에서 로보 모빌리티는 인간이 원할 때조차 스티어링을 건네지 않는다. 오히려 이동 과정에서 로봇과 인간의 사고율 통계를 보여주며 인간 운전은 사회악이고, 인간의 운전 요구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임을 부각시킨다. 그래도 요구하면 로봇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스티어링은 건네주지만 스스로 운행을 멈출 수도 있다. 로봇이 인간을 믿지 못해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 한다는 의미다. 이른바 ‘사피엔스의 충돌’이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는 인류의 역사적 이야기지만 앞으로 다가올 인간과 로봇의 미래 충돌도 예측하게 만든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유럽과 아시아에 먼저 자리 잡았던 다른 인류 종들(네안데르탈인)과 충돌하며 발생한 것이 폭력과 흡수다. 지능이 뛰어난 사피엔스를 이길 수 없었던 다른 종들이 결국 사피엔스에 의해 없어지거나 일부 흡수되며 인류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결국, '로보 사피엔스 모빌리티'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인류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과거 호모 사피엔스가 압도적인 인지 능력을 무기로 다른 종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듯 점차 데이터와 효율로 무장한 로보 사피엔스 모빌리티가 인간의 '운전할 권리'와 '자유 의지'를 위협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로봇이 인간을 불완전하고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며 스티어링 휠을 거두어가는 순간 인간은 이동 주체에서 단순히 실려가는 '이동 객체'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로봇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나기보다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인 '윤리적 책임'과 '비합리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서둘러야 한다. 만약 우리가 효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로봇 논리에 순응하기만 한다면 미래의 역사는 사피엔스가 기계에 의해 '흡수'되거나 '도태'된 또 하나의 멸종사로 기록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 자문해야 한다. 로봇이 보장하는 완벽한 안전 속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더라도 인간으로서 통제권을 끝까지 사수할 것인가. 사피엔스의 운명을 가를 진짜 '충돌'은 이제 막 시작됐다.
권용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