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량과 이미지 회복 모두 가져야 하는 차
-가격이 전부가 아닌 강한 설득력 있어야 경쟁 가능
폭스바겐이 소형 전기 SUV ID. 크로스를 공식 선보였다. 독일 기준 시작 가격은 약 2만8,000유로, 우리 돈으로 약 4,000만원 안팎이다. 겉으로 보면 보급형 전기차 시장을 겨냥한 신차 하나가 추가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ID. 크로스가 짊어진 의미는 단순한 신차 출시를 넘어선다. 이 차는 많이 팔려야 하고 브랜드 이미지도 바꿔야 하는 두 가지 숙제를 앉고 성공해야 하는 차다. 지금의 폭스바겐을 구할 카드여야 하기 때문이다.

폭스바겐은 최근 몇 년 동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전기차 전환은 기대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고 야심차게 내놓은 ID. 시리즈 역시 시장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때 골프와 비틀로 대중차의 기준을 만들었던 브랜드가 전기차 시대에서는 가격과 상품성, 브랜드 경쟁력까지 동시에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실제로 폭스바겐은 ID.4와 ID.5, ID.7, ID. 버즈까지 차급을 넓혔지만 초기 판매 흐름은 폭스바겐의 규모와 투자에 비하면 미지근했다. 참고로 그룹의 순수전기차 판매는 2024년 74만4,800대로 전년보다 3.4% 감소했다. 같은 해 1분기에도 13만6,400대에 그치며 전년 동기 대비 3% 줄었다.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전환한 독일 츠비카우 공장의 가동률과 고용 문제가 불거진 배경에도 기대를 밑돈 전기차 수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최근 흐름은 달라졌다. ID.4와 ID.5는 2025년 상반기 세계 시장에서 합산 8만4,900대, ID.7은 3만8,700대, ID. 버즈는 상용형을 포함해 2만7,600대가 팔렸다. 이에 폭스바겐 브랜드의 유럽 전기차 판매도 그 해 약 24만7,900대로 전년보다 49.1% 늘었다. 폭스바겐그룹 역시 유럽 순수전기차 시장에서 약 27%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기존 ID. 시리즈가 실패했다고만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다. 다만 폭스바겐이 기대했던 전기차 시대의 골프가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장세는 분명하지만 여러 차종을 동원하고도 시장을 단숨에 바꿀 정도의 압도적인 단일 베스트셀러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과 투자 비용을 생각하면 뼈아플 수밖에 없는 결과다.
더 큰 문제는 경쟁자의 변화다. 과거 폭스바겐의 경쟁 상대가 유럽과 일본, 한국 완성차였다면 이제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그 자리를 빠르게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이다. 지난해 중국에서만 1,300만대 이상의 전기차가 판매됐고 전체 신차 판매 가운데 전기차 비중은 약 55%까지 올라섰다. 올해에는 중국 내 전기차 판매 비중이 전체 자동차 판매의 60%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값싼 배터리와 빠른 개발 속도,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한 중국 업체들은 이제 자국 시장을 넘어 유럽으로 본격 진격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의 위협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BYD는 올해 1분기 유럽에서만 전년 대비 크게 늘어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리프모터의 경우 T03를 앞세워 같은 기간 약 1만4,900대가 팔리며 베스트셀링 9위, 보급형 전기차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이처럼 중국 업체들이 더 이상 싸기만 한 차를 파는 수준이 아니라 디자인과 주행거리, 편의 사양까지 갖춘 전기차를 내놓고 있다는 점은 폭스바겐에 더욱 부담이다.
그래서 ID. 크로스의 가격 전략은 더욱 중요하다. 폭스바겐은 2만8,000유로라는 가격표를 앞세워 보급형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 가격이 압도적인 무기는 아니다. 유럽에서 판매 중인 BYD 아토 2 라던지 MG S5 EV의 경우 기본 가격이 2만8,990유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프로모션이 활발하고 보조금 적용 여부에 따라 2만유로 중반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리프모터 T03 역시 약 1만9,500유로까지 내려간다. 이처럼 중국 업체들은 이미 낮은 가격을 유럽 시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ID. 크로스가 저가 전기차라는 타이틀만으로 시장을 장악하기 어려운 이유다.
물론 ID. 크로스는 중국산 초저가 전기차와 단순히 가격표만 비교할 차는 아니다. 차체 크기와 상품 구성, 브랜드 신뢰도, 유럽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비스 네트워크와 잔존가치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최대 약 427㎞의 WLTP 기준 주행거리와 다양한 배터리 및 출력 구성, 마사지 시트와 첨단 운전자 보조 기능 등은 폭스바겐이 단순히 싼 전기차가 아닌 제대로 만든 보급형 전기 SUV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소비자의 선택은 생각보다 냉정하다. 폭스바겐이 ID. 크로스를 통해 보여줘야 하는 것은 중국차보다 더 믿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중국 전기차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더 나은 품질과 완성도, 서비스, 브랜드 가치를 제공한다는 확실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2만8,000유로라는 가격은 보급형이 아니라 또 다시 어중간한 가격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
폭스바겐의 상황이 더 절박한 이유는 내부 사정 때문이다. 회사는 최근 대규모 비용 절감과 인력 감축을 검토하고 있으며 독일 내 생산시설 효율화와 공장 폐쇄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최대 10만명 수준의 인력 감축 가능성을 포함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과 유럽 내 중국 브랜드 공세, 높은 생산 비용이 동시에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ID. 크로스는 한 대의 소형 전기 SUV가 아니다. 폭스바겐이 전기차 시대에도 여전히 대중차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시험대다. 내연기관 시대의 골프가 그랬고 비틀이 그랬듯 누구나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으면서도 만족감은 충분한 전기차를 만들어야 한다. ID. 크로스의 가격은 분명 가볍다. 하지만 중국 전기차와의 경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그 차가 짊어진 폭스바겐의 미래는 그 어느 신차보다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