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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 품격으로 물든 검은 궁전, 레인지로버 SV 블랙

입력 2026-10-07 00:00 수정 2026-10-07 08:50

 -깊이와 존재감 드러내는 최상위 SV 시리즈
 -타고 이동하며 내리는 전 과정에서 품격 키워

 

 자동차 시장에서 블랙 에디션은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차체를 검게 칠하고 그릴과 휠, 엠블럼까지 어둡게 다듬어 강한 인상을 만드는 방식은 이미 여러 브랜드가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레인지로버 SV 블랙'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접근법을 떠올렸다. 기존 레인지로버에 검은색을 칠해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 차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차를 마주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블랙이라는 색 자체보다 무엇을 검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검은색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 출발점부터 다르다. 레인지로버 가운데서도 최상위에 자리한 SV를 바탕으로 블랙의 깊이를 더했다는 것. 단순히 강렬하거나 위압적인 모습에 그치지 않고 레인지로버가 가진 품격과 존재감을 더욱 짙게 만드는 방향이다.

 

 외관은 나르비크 글로스 블랙으로 통일했다. 커다란 차체를 뒤덮은 짙은 검정은 레인지로버 특유의 단정한 면과 간결한 선을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보여준다. 전면 글로스 블랙 메시 그릴과 보닛 레터링, 다크 글로스 그릴 오벌까지 어느 한 부분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옆에는 23인치 단조 휠이 시선을 잡는다. 역시 나르비크 글로스 블랙으로 마감했고 브레이크 캘리퍼와 레터링까지 최대한 색을 절제했다. 여기에 뒤쪽에는 블랙 세라믹 SV 라운델을 넣었다. 흔히 블랙 패키지를 적용하면 장식 요소가 묻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지만 SV 블랙은 반대다. 빛을 받았을 때 각기 다른 표면과 소재가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며 차체의 입체감을 살린다. 화려한 장식을 더해서 존재감을 만드는 차가 아니라 색을 덜어내면서 오히려 존재감을 키웠다는 게 마음에 든다. 거대한 차체와 절제된 디자인, 최고급 소재가 만나 블랙 자체를 하나의 럭셔리 요소로 활용한다.

 

 하지만 진짜 놀라움은 두툼한 도어를 열었을 때 시작한다. 외관이 블랙의 강렬함을 보여준다면 실내는 블랙이 얼마나 고급스러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글로시한 외관과 달리 안쪽은 새틴 블랙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니어 아닐린 에보니 가죽은 손끝으로 느껴지는 질감부터 남다르다. 내추럴 블랙 버치 베니어와 새틴 블랙 세라믹 기어 시프트, 문라이트 크롬 디테일까지 소재 하나하나가 분명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플라스틱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손이 닿고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영역을 질 좋은 가죽과 금속, 우드로 채웠다. 값비싼 소재를 단순히 많이 사용하는 것과도 조금 다르다. 서로 다른 소재의 질감과 광택을 절묘하게 조율해 어느 하나 과하게 튀지 않는다. 고급 가죽과 차가운 금속, 매끄러운 우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소재의 향연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다.

 

 시트도 특별하다. 싱글 패널 시트 커버를 적용해 스티치와 이음매를 최소화했고 상단에는 그라데이션 직사각형 천공 패턴과 전용 자수를 넣었다. 화려한 로고나 장식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가까이에서 살펴볼수록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절정은 2열로 향한다. 롱 휠베이스 차체가 만들어내는 공간부터 압도적이다. 웬만한 대형 세단도 부럽지 않은 수준을 넘어 SUV에서 이 정도 공간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다. 1.2m가 넘는 레그룸은 단순히 다리를 편하게 뻗는 수준이 아니다. 조수석을 앞으로 밀고 접으면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높은 차체 덕분에 머리 위 공간까지 넉넉하니 시각적인 개방감은 오히려 최고급 세단보다 뛰어나다.

 

 여기에 SV 시그니처 스위트의 각종 기능이 더해진다. 중앙 콘솔에서 전동식 클럽 테이블이 부드럽게 올라온다. 움직임부터 묵직하고 완성도가 높다. 얇은 판 하나를 펼쳐놓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 고급 가구를 차 안에 설치한 것 처럼 견고하다. 컵홀더 역시 전동으로 작동하고 중앙 냉장고까지 버튼 하나로 열고 닫을 수 있다.

 

 이 모든 기능은 중앙의 8인치 통합 터치스크린을 통해 손쉽게 다룰 수 있다.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좌석 위치부터 각종 편의 기능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양쪽에는 13.1인치 엔터테인먼트 스크린이 자리하며 크리스털 샴페인과 고급스러운 무드등, 마사지 기능은 기본중에 기본이다.

 

 이쯤 되면 자동차의 뒷좌석이라기보다 이동하는 개인 라운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넓은 레그룸과 높은 시야, 여유로운 헤드룸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개방감은 대형 럭셔리 세단과 또 다른 매력이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럭셔리 SUV 가운데 2열 공간이 가장 인상적인 차 중 하나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보닛 아래에는 SV 전용 V8 가솔린 터보 엔진과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들어간다. 최고출력 615마력, 최대토크 76.5㎏·m를 발휘하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단 4.7초 만에 도달한다. 최고속도는 시속 261㎞다. 숫자만 보면 거대한 럭셔리 SUV와 쉽게 연결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실제 가속은 예상보다 훨씬 가뿐하다. 분명 차체가 크고 무게도 상당한데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느껴지는 반응에는 굼뜬 구석이 없다. 그렇다고 차가 가볍게 움직인다는 뜻은 아니다. 묵직한 중심과 높은 고속 안정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손쉽게 속도를 끌어올린다.

 

 이 차의 빠름은 자극적이지 않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다이내믹 모드를 선택하고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엄청난 힘을 보여주지만 운전자를 흥분시키려고 일부러 과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V8 엔진과 배기음도 예상보다 절제돼 있다. 615마력이라는 숫자를 자랑하기 위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의 힘을 즉시 꺼내 쓰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서두르지 않고 자극을 걷어냈다. 그리고 담백하게 고속 영역으로 향한다. 레인지로버 SV가 생각하는 고성능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승차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명불허전이다. 흔히 좋은 승차감을 표현할 때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하다는 말을 쓰는데 SV 블랙에서는 이 표현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차가 도로 위를 부드럽게 떠서 미끄러져 나가는 느낌이다. 미세한 노면 진동이나 자잘한 요철 정도는 너무나 쉽게 걸러낸다.

 

 과속방지턱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 눈앞에서 커다란 턱을 확인했고 차가 그 위를 지나갔는데 몸으로 전달되는 충격은 놀라울 정도로 작다. 거대한 차체가 출렁이며 충격을 흡수하는 방식도 아니다. 차체 움직임은 차분하게 억제하면서 바퀴와 서스펜션이 노면의 굴곡을 능숙하게 처리한다.

 

 덕분에 앞좌석에서도 편하지만 2열에서는 이 차의 진가가 더욱 선명해진다. 광활한 공간과 편안한 시트, 우수한 방음, 부드러운 승차감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이동 자체가 휴식이 된다. 레인지로버가 오랜 시간 럭셔리 SUV의 기준으로 평가받은 이유를 몇 ㎞만 달려도 이해할 수 있다.

 

 주행 모드도 다양하다. 다이내믹 모드에서는 615마력의 힘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랜드로버의 장기인 터레인 시스템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3억원 중반부터 시작하는 SV 블랙을 몰고 진흙탕이나 험로를 찾아갈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용할 일이 적다는 것과 애초에 능력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평생 한 번 사용할 기능이라도 필요할 때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화려한 드레스 슈즈처럼 보이면서도 필요하면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 이것 역시 레인지로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가치다.

 

 주행하면서 예상 밖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사운드다. SV 블랙에는 메리디안 시그니처 사운드 시스템이 들어간다. 35개의 스피커와 1,680W 출력이라는 숫자부터 상당하지만 진짜 가치는 단순한 음량이나 스피커 개수에 있지 않다. JLR과 메리디안은 2010년부터 협업을 이어왔고 메리디안 엔지니어는 신차 설계 초기부터 실내 소재와 구조, NVH 등을 고려해 오디오 시스템을 개발한다.

 

 그 결과 SV 블랙의 실내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청음 공간처럼 느껴진다. 소리가 특정 스피커에서 들린다는 느낌보다 공간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볼륨을 높여도 특정 음역이 과하게 튀지 않고 낮은 음은 깊고 단단하게 깔린다. 무엇보다 정숙성이 뛰어난 차체와 만나 음악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낸다.

 

 더 특별한 기능은 센서리 플로어다. 시트에만 햅틱 피드백을 주는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플로어 매트까지 음악의 일부로 활용한다. 전·후석 플로어에 내장한 4개의 트랜스듀서가 바디 앤 소울 시트의 4개 트랜스듀서와 함께 작동한다.

 

 음악이 귀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낮은 음이 울릴 때 발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올라오고 시트를 통해 등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마사지 기계처럼 억지로 몸을 흔드는 느낌은 아니다. 음악의 리듬과 진동을 정교하게 맞춰 소리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AI 최적화 소프트웨어와 메리디안 시그니처 사운드 시스템, 햅틱 시트가 함께 작동하면서 귀와 몸 전체를 하나의 청취 영역으로 만든다. 

 

 레인지로버 SV 블랙을 시승하고 난 뒤 처음 가졌던 블랙 에디션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차에서 블랙은 레인지로버가 가진 최고급 소재와 장인정신, 넓은 공간과 압도적인 안락함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표현 방식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지 않고 감추는 데 능숙하다. 필요할 때는 615마력을 꺼내 쓰고 험로에서는 랜드로버의 실력을 발휘하며 평소에는 탑승자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에 가둬놓는다.

 

 그래서 블랙이 잘 어울린다. 겉으로 요란하게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차이기 때문이다. 깊고 짙은 검정 속에 레인지로버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수많은 블랙 에디션이 존재하지만 레인지로버 SV 블랙은 검게 칠한 차 그 이상이다. 블랙이라는 색에 품격을 부여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차다.

 

 김성환 기자 swkim@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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