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화 시대에도 변하지 않은 포르쉐의 철학
-빠르기보다 완성도, 스포츠카보다 그랜드 투어러
-'잘 만든 전기차' 대신 '포르쉐다운 전기차'
우리가 포르쉐에 열광하는 이유는 많다. 누군가는 수평대향 4기통 엔진을, 누군가는 레이스의 역사를 말한다. 시대가 변해도 그대로인 특유의 실루엣은 또 어떤가.

하지만 조금 더 크게 보면 사람들의 답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스티어링을 돌리는 감각, 브레이크를 밟을 때의 자신감, 원하는만큼 움직이는 차체. 그리고 하루 종일 달려도 피곤하지 않다는 점 까지.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포르쉐만의 고유한 성격 때문이다. 다시말해 포르쉐를 포르쉐답게 만드는건 엔진이 아니라 철학이다. 그렇다면 전기차도 그럴까.
▲디자인&상품성
타이칸의 첫인상은 낮고 넓다. 전기차 특유의 미래적인 비례를 갖췄지만 멀리서도 포르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네 개의 펜더가 또렷하게 솟아 있고 보닛은 낮게 깔렸으며, 지붕선은 뒤로 갈수록 완만하게 떨어진다.
시승차인 블랙에디션의 성격은 이 비례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제트 블랙 메탈릭 차체에 하이글로스 블랙 디테일, 블랙 모델 레터링, 블랙 사이드 윈도우 트림, 블랙 도어 미러, 조명식 블랙 포르쉐 로고가 더해지며 차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전면부는 내연기관 포르쉐와 다른 방식으로 공격적이다.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 대신 공기 흐름을 정리하는 면과 에어 커튼이 중심을 이룬다. 헤드램프 주변을 깊게 파낸 그래픽은 911보다 더 미래적이고 낮은 보닛과 넓은 앞 펜더는 타이칸이 포르쉐 스포츠카의 문법 안에서 태어난 차임을 보여준다.
측면은 이 차의 백미다. 4,963㎜의 길이와 2,900㎜의 휠베이스를 가진 대형 전기 GT지만, 실제로는 수치보다 훨씬 낮고 날렵하게 보인다. 1,379㎜에 불과한 전고와 1,966㎜의 넓은 차폭이 만들어내는 비례 덕분이다. 낮은 차체, 긴 휠베이스, 짧은 오버행, 두툼한 펜더가 하나로 묶여 포르쉐다운 근육질을 보여준다.
후면부는 가장 절제됐지만 가장 포르쉐다. 좌우를 길게 잇는 라이트 스트립과 조명식 블랙 로고는 타이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만든다. 특히 블랙 에디션에서는 로고와 라이트 그래픽이 차체와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밤에는 빛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낮에는 차분하게 숨어든다. 고성능차가 꼭 큰 배기구와 과격한 스포일러로 말할 필요는 없단걸 보여준다.

실내는 철저히 운전자 중심이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계기반과 스티어링 휠로 모이고 낮은 시트 포지션은 일반 전기 세단보다 스포츠카에 가깝다. 타이칸이 단순히 실내를 화면으로 채운 전기차가 아니라,운전자를 중심에 둔 포르쉐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소재의 감각도 중요하다. 시승차에는 올레아 클럽 가죽 인테리어와 바살트 블랙 컬러, 가죽 및 레이스 텍스 스티어링 휠, 카본 매트 트림, 가죽 선바이저 등이 적용됐다. 블랙 에디션이라는 이름에 맞게 실내 역시 어둡고 밀도 높은 분위기다.




상품성은 ‘기본형’이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한다. 타이칸 4 블랙에디션은 최상위 트림은 아니지만 실제 구성은 꽤 풍부하다.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 어댑티브 에어 서스펜션, 리어 액슬 스티어링, HD 매트릭스 LED 헤드라이트, 4존 온도 조절 시스템, 보스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차선 변경 어시스트, 서라운드 뷰와 액티브 파킹 서포트 등이 적용됐다. 빠른 차 이전에 매일 탈 수 있는 포르쉐라는 성격이 강하다.
공간도 GT답다. 앞 트렁크는 81ℓ, 뒤 적재공간은 407ℓ다. 뒷좌석은 4+1 구성이며 40:20:40 비율로 접을 수 있어 일상 활용성도 충분하다. 스포츠카처럼 낮게 앉지만, 실제 쓰임새는 세단과 왜건 사이에 가깝다. 포르쉐가 말하는 ‘매일 탈 수 있는 스포츠카’라는 개념이 전기차에서도 이어지는 대목이다.

▲성능
시승차는 최고출력 435마력, 최대토크 62.2㎏·m를 내는 타이칸 4 블랙 에디션이다. 제로백은 4.6초다. 냉정히 말해 1,000마력이 우스워진 시대다 보니 그리 인상적인 출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막상 운전대를 잡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필요한 만큼만 즉각 반응하고 코너에서는 스티어링을 돌린 각도만큼 정확하게 차체가 따라온다. 브레이크는 회생제동과 유압 브레이크의 경계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리고 다시 가속하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의 동작처럼 이어진다. 균형감. 타이칸의 가장 큰 무기다.
특히 이번 시승차에 적용된 리어 액슬 스티어링은 2.3톤이 넘는 차체를 믿기 어려울 만큼 민첩하게 만든다. 저속에서는 짧은 스포츠카처럼, 고속에서는 긴 휠베이스의 GT처럼 움직인다. 차체 크기보다 한 체급 작은 차를 운전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대부분의 전기차는 무거운 배터리를 바닥에 깔아 무게중심을 낮췄다는 점을 강조한다. 타이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포르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앞바퀴가 노면을 움켜쥐는 느낌, 조향각에 따라 앞머리가 지체 없이 코너 안쪽으로 파고드는 움직임, 그리고 그 궤적을 후륜이 매끄럽게 따라오는 일련의 과정이 매우 정교하다.
코너 중반에서 드러나는 차체의 자세 제어는 포르쉐다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전기차는 배터리 무게를 버티기 위해 단단한 서스펜션으로 롤을 억제하거나, 반대로 안락함을 위해 차체 움직임을 크게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 타이칸은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았다.
차체는 필요한 만큼만 기울고, 그 움직임마저 운전자에게 예고하듯 일정하게 진행된다. 덕분에 조향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 거의 없고, 한 번 그린 라인을 끝까지 유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것이 서킷에서 포르쉐가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운전자가 차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축을 중심으로 회전시킨다'는 감각이다. 코너 진입에서 브레이크를 남겨둔 채 앞축에 하중을 실으면 노즈는 자연스럽게 에이펙스를 향하고 스로틀을 여는 순간에는 네 바퀴가 동시에 노면을 움켜쥐며 차를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 일체감. 포르쉐 팬들이 흔히 말하는 '프런트가 살아있다', '차가 손끝으로 말한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감각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여기에 포르쉐만의 후륜 2단 변속기는 타이칸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전기차가 고속으로 갈수록 가속력이 점차 무뎌지는 반면, 타이칸은 속도가 올라갈수록 꾸준히 힘을 이어간다. 최고속 영역에서도 여유를 남겨두는 감각은 고속 순항을 염두에 둔 그랜드 투어러의 성격과 맞닿아 있다.
승차감 역시 인상적이다. 어댑티브 에어 서스펜션은 노면 충격을 부드럽게 걸러내면서도 차체를 느슨하게 만들지 않는다. 스포츠 모드에서도 불필요하게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고, 컴포트 모드에서는 대형 럭셔리 세단처럼 여유롭다. 그러면서도 코너 하나만 만나면 곧바로 포르쉐다운 긴장감을 되찾는다. 그래서 타이칸은 스포츠 세단이면서 동시에 GT다.

GT는 단순히 빠른 차가 아니다. 장거리를 빠르고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차다. 정숙성과 안정감, 언제든 추월할 수 있는 여유, 운전자에게 피로를 주지 않는 완성도가 GT의 본질이다. 타이칸은 그 정의를 전기차 시대에 가장 충실하게 해석한 차다.
GT의 자격은 단순히 빠른 것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오래 달릴 수 있어야 하고, 멈춘 뒤에도 다시 출발하는 시간이 짧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타이칸은 성능뿐 아니라 연속성까지 고려한 차다. 105㎾h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를 탑재해 국내 인증 기준 1회 충전 시 489㎞를 달릴 수 있으며 320㎾급 초급속 충전을 지원한다. 배터리 잔량을 비우는 것보다 다시 채우는 시간이 짧다는 점은 장거리 여행에서 큰 장점이다.

▲총평
자동차 산업은 지금 거대한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내연기관은 전기모터로 바뀌고 변속기는 사라졌으며, 자동차의 가치는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기술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기술의 평준화가 이뤄질수록 브랜드를 구분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결국 소비자가 기억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어떤 감각을 남기는가, 어떤 철학을 담아냈는가가 브랜드의 가치를 결정한다. 타이칸은 그 점에서 포르쉐의 답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스티어링을 돌리는 순간의 정확함, 브레이크를 밟을 때의 신뢰감, 코너를 빠져나가는 차체의 일체감, 그리고 장거리를 편안하게 달리는 그랜드 투어러의 여유까지. 사람들이 포르쉐를 사랑했던 이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엔진은 시대와 함께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운전자를 설레게 하는 철학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타이칸은 그 사실을 가장 포르쉐다운 방식으로 증명한 전기차였다.
타이칸 4 블랙 에디션의 국내 판매가격은 1억5,630만원부터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