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카의 전유물, SUV로 내려와
-역동적인 움직임과 고요한 실내 조화
만년설이 덮인 로키산맥 능선이 지평선 너머까지 아득히 이어진다. 그 아래로 평원도 끝없이 펼쳐지고 들쭉날쭉한 바위, 키 작은 소나무가 간간이 보인다.
미국 몬태나주 옐로스톤 국립공원 외곽. 한때 아메리칸 들소가 수백마리씩 떼지어 다녔을 이곳에 벤틀리를 몰고 왔다. 정확히는 벤틀리 벤테이가 스피드. 그리고 이 차에 대한 기억은 매끈한 아스팔트보다 거친 비포장로에서 더 선명하다. 벤틀리는 이 길 위에서 드리프트를 허용했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말이다.
황량한 비포장로에서 무작정 속도를 내는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럴만한 길도 없고 설령 그런 길이 있다 하더라도 차체 손상이나 안전사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SUV는 외형만 그럴싸 할 뿐 실제로는 도심형에 가깝다.
그리고 이 차는 벤틀리다. 흔치 않은 경험을 벤틀리로 하고 있으니 말이 안됐다. 크롬, 가죽, 억 단위의 가격표, 왠지 모르겠지만 떠오른 영화 2012까지. 오프로드의 먼지구덩이에서 차가 미끄러지는데 말도 안 되는 순간이 펼쳐지니까 오히려 정신이 멍해졌다. 럭셔리 SUV가 흙먼지 속에서 뒤꽁무니를 날리고 있으니 이건 현실이라기보단 어딘가 이상한 꿈 같았다.
그 속에서도 실내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조용했다. 외부에선 흙먼지가 솟구치고, 타이어가 자갈을 걷어차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지만 운전석 안은 여전히 벤틀리였다. 스티어링을 감싸고 있는 가죽은 부드러웠고 시트의 퀼팅 패턴은 고요했다. 호텔 스위트룸이 통째로 사막의 모래 폭풍을 통과하는 느낌이라 해야할까. 이런 표현이 맞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차는 650마력의 V8 트윈터보를 품은 괴물이다. 시동을 켜자 우아한 배기음이 깨어났고, 잠시 뒤 드라이브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는 순간 차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했다. 댐퍼는 15% 단단해졌고, 스로틀 응답은 살아서 꿈틀거렸다.
벤틀리는 이 차를 위해 런치 컨트롤까지 얹었다. 스포츠카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기술이 고급 SUV에서 작동한다. 버튼을 누르고 페달을 고정한 채 손을 떼면 0-100㎞/h까지 단 3.4초. 오프로드에선 런치 컨트롤이 과한 기술처럼 보일지 몰라도, 벤테이가는 그것마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다.
전자식 올 휠 스티어링은 저속에선 후륜을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좁은 코너를 민첩하게 돌아나가고 고속에서는 전륜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흔들림 없는 자세를 잡는다. 이 기능 덕분에 비포장에서도 정교한 스티어링 입력만으로도 차는 운전자의 의도를 정확히 따라간다. 그립이 부족한 노면에서 회전반경까지 짧아지니 조금만 스티어링을 과감히 틀어줘도 뒤가 꿈틀댄다.
벤틀리는 벤테이가 스피드를 통해 럭셔리와 퍼포먼스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급 가죽과 퀼팅으로 뒤덮인 실내에서 운전자는 차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망상에 빠지고 벤테이가는 그 망상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시트 뒤에서 울리는 배기음, 날카롭게 반응하는 서스펜션, 스티어링에 전해지는 피드백으로 말이다.
V8 엔진, 650마력, 최고속도 310㎞/h, 정지 상태에서 100㎞/h 까지 3.4초.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차가 전달하는 감각이다. 바위와 흙, 먼지와 하늘을 가르며 미끄러질 때조차 차는 고결함을 잃지 않는다. 그 어떤 SUV보다도 역동적이고, 그 어떤 벤틀리보다도 야성적이다.
벤틀리는 SUV를 만든 게 아니다. 벤틀리를 만들었다. 단지 그것이 SUV 형태였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럭셔리 SUV로도 드리프트가 가능하다는 믿기 힘든 세계에 발을 들였다.
몬태나(미국)=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