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아닌 감각으로 증명하는 드라이빙 머신
-자연흡기 엔진과 경량 차체가 빚어낸 운전의 본질
자동차 역사에서 유산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르쉐 911 GT3 투어링 패키지는 지금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자동차 유산 중 하나다.


이유는 분명하다. 자동차의 심장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다운사이징과 터보를 넘어 이제는 전기모터와 배터리가 고성능차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던 슈퍼카들조차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전기모터의 힘을 빌려 네 자릿수 출력을 이야기한다. 1,000마력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다.
그 한가운데에서 911 GT3 투어링 패키지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배기량 4.0ℓ의 수평대향 6기통 자연흡기 엔진을 뒤에 얹고 최고출력 510마력을 낸다. 터보차저도 전기모터도 없다. 오롯이 엔진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연료를 태우며 회전수를 끌어올려 힘을 만든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박물관에서나 귀하게 바라봐야 할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는 순간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단순히 빠른 자동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했던 스포츠카의 한 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지켜주고 보호해야 할 것 같은 묘한 책임감마저 생긴다.
▲1만RPM 계기판이 알려주는 존재 이유
시동을 걸면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운전석 정면 계기판에는 1만RPM까지 숫자가 새겨져 있다. 5시 방향에서 시작한 바늘은 운전자의 오른발에 맞춰 거침없이 위로 솟구친다. 자연흡기 엔진의 진가는 고회전 영역에서 드러난다. 회전수를 높일수록 힘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살아난다. 낮은 음색으로 시작한 엔진 소리는 어느 순간 금속성 울림을 품고 마지막에는 공기를 찢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뀐다. 귀로 듣는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등 뒤에서 울리고 시트를 타고 몸으로 들어오며 손끝과 발끝까지 진동을 전달한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 모든 과정에서 기다림이 없다는 것이다. 터보 엔진에서 느껴지는 아주 짧은 지연조차 없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엔진이 즉각 반응하고 오른발을 조금 더 누르면 정확히 그만큼 회전수가 따라 올라간다. 사람과 기계 사이에 불필요한 번역 과정이 사라진 느낌이다.





PDK 역시 압권이다. 변속 속도는 눈 깜짝할 사이지만 그렇다고 존재감을 완전히 숨기지는 않는다. 단수가 바뀔 때마다 적당한 충격을 몸으로 전달한다. 마치 시퀀셜 기어를 사용하는 경주차를 다루는 것처럼 '철컥' 하고 다음 단수를 물고 들어가는 감각이 살아 있다. 그만큼 엔진이 가진 능력을 변속기가 두 배로 키워주는 듯하다. 어느 순간에는 엔진과 변속기를 따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서로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오랜 파트너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1,000마력보다 짜릿한 510마력
요즘 고성능 전동화 차를 타다 보면 숫자에 무감각해질 때가 있다. 600마력, 700마력을 넘어 이제는 1,000마력 이상의 자동차도 어렵지 않게 등장한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목이 뒤로 꺾이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엄청난 속도에 도달한다.
분명 빠르다. 하지만 빠른 것과 재미있는 것은 반드시 같은 뜻이 아니다. 911 GT3 투어링 패키지를 타면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510마력이라는 숫자가 요즘 기준으로는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 도로에서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이 힘을 내가 직접 꺼내 쓰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강하다.
비결은 가벼움이다. 차가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서 질량이 적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가속할 때는 가볍게 튀어나가고 방향을 바꿀 때는 망설임 없이 몸을 틀며 브레이크를 밟으면 깔끔하게 속도를 걷어낸다. 무거운 해머로 노면을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잘 훈련된 경량급 스프린터가 사뿐사뿐 지면을 박차고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그래서 510마력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다. 출력이 운전자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출력을 다스릴 수 있다. 엔진과 변속기, 차체와 서스펜션, 타이어와 브레이크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완벽한 합주를 이룬다. 어느 하나가 튀어나와 다른 부분을 덮어버리지 않는다.
반대로 엄청난 출력과 무거운 배터리를 품은 일부 고성능 전동화 차는 힘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너무 높은 출력은 때로 즐거움보다 부담으로 다가온다. 자동차와 교감하기 전에 속도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먼저 찾아온다.
GT3 투어링 패키지는 다르다. 출력의 절대적인 크기가 운전 재미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적당한 고출력과 가벼운 몸무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자연흡기 엔진과 이를 완벽하게 받쳐주는 변속기, 오랜 시간 검증된 섀시가 하나로 맞물린다. 좋은 스포츠카를 만드는 것은 숫자의 덧셈이 아니며 얼마나 많은 요소가 정확한 비율로 어우러지는가를 일깨워준다.
▲차를 알아가는 만큼 내가 빨라진다
911 최상위 고성능 버전다운 실력은 코너에서 더욱 또렷하게 나타난다. 빠르게 진입해도 차는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다. 운전자가 바라보는 곳을 정확하게 읽고 앞머리를 밀어 넣는다. 이어지는 동작 역시 군더더기가 없다.
스포츠 또는 스포츠 플러스로 주행모드를 바꾸면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진다. 가속페달 반응과 변속 타이밍은 한층 날카로워지고 차 전체가 팽팽하게 긴장한다. 작은 입력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운전자의 감각을 깨운다.
그렇다고 어렵기만 한 자동차도 아니다. 오히려 차의 움직임이 워낙 정확하고 솔직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붙는다. 처음에는 차가 가진 능력을 조심스럽게 탐색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면 제동 시점을 늦추고 코너 진입 속도를 높이게 된다. 가속페달을 여는 시점 역시 자연스럽게 빨라진다.
재미있는 건 그 과정에서 자동차만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운전자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움직임으로 알려준다. 차와 함께할수록 운전 실력이 조금씩 늘어나는 기분. 고성능 스포츠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즐거움 중 하나다.





▲평범한 911인 척하는 괴물
이토록 강렬한 주행 감각과 달리 외관은 의외로 차분하다. 이것이 투어링 패키지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GT3를 상징하는 거대한 스완넥 리어윙을 과감하게 걷어냈다. 대신 독특한 엔진룸 커버와 얇은 리어 스포일러 엣지, 날카로운 디퓨저를 넣었다. 얼핏 지나가며 본다면 평범한 911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차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닛에 깊게 파놓은 에어덕트부터 심상치 않다. 앞 범퍼에는 엄청난 양의 공기를 삼킬 것 같은 매쉬 타입 공기흡입구가 자리하고 아래에는 두툼한 스플리터가 바닥을 훑는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껏 부풀린 펜더 안쪽으로 센터락 방식의 경량 단조 휠이 꽉 들어차 있다. 그 뒤에는 거대한 PCCB 브레이크 시스템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노면과 맞닿은 곳에는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컵 2 타이어가 자리한다. 여러모로 이 차의 진짜 목적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마치 잘 차려입은 정장 안에 단련된 근육을 숨긴 운동선수 같다. 보여주기 위해 힘을 쓰지 않는다. 필요한 순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는 자신감만 조용히 드러낸다.
실내에서도 같은 철학이 이어진다. 기본적인 구성은 익숙한 911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곳곳에 GT3의 흔적이 숨어 있다. 몸을 단단히 붙잡는 풀카본 버킷 시트는 보기만 해도 트랙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헤드레스트를 탈거할 수도 있는데 트랙에서 핼맷을 착용했을 때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이와 함께 수동변속기를 연상시키는 PDK 레버는 손으로 직접 잡고 변속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더미키를 돌려 시동을 거는 과정도 좋다. 버튼 하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시대에 굳이 손목을 돌리는 작은 의식을 남겨놓았다. 효율만 생각하면 필요 없는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스포츠카에는 이런 작은 번거로움이 필요하다.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로 느끼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빠른 자동차는 많지만 이런 자동차는 많지 않다
911 GT3 투어링 패키지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4초 만에 도달하고 최고속도는 시속 311㎞에 이른다. 충분히 빠르다. 하지만 며칠 동안 차를 경험하고 나면 이런 숫자는 오히려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 차의 진짜 가치는 기록지가 아니라 운전자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이다. 1만RPM까지 새겨진 계기판을 바라보며 회전수를 끌어올렸던 순간, 등 뒤에서 자연흡기 박서 엔진이 토해낸 날카로운 울림, PDK가 다음 단수를 거칠게 물었을 때 몸으로 전달되던 작은 충격, 코너 하나를 제대로 통과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성취감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시대는 분명 변하고 있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하며 더 효율적인 자동차가 계속 등장할 것이다. 전기모터와 배터리는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성능을 보여주고 있고 앞으로 네 자릿수 출력 역시 특별하지 않은 숫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911 GT3 투어링 패키지 같은 자동차는 남아 있어야 한다. 좋은 스포츠카란 그저 숫자로 증명하는 강한 힘을 내는 자동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을 조율하는 운전자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운전한다'는 행위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다. 그래서 이 차를 유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과거의 방식을 고집해서가 아니다. 오랜 시간 스포츠카가 추구해온 본질을 가장 현대적인 기술로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하는 자동차 산업 한가운데서 포르쉐가 무엇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지 911이라는 이름이 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차다.
언젠가 자연흡기 엔진의 굉음이 지금보다 훨씬 귀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지금의 911 GT3 투어링 패키지를 떠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9,000RPM 넘게 엔진을 돌리고 그 소리를 온몸으로 들으며 가벼운 차체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동차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록보다 기억에 남겨두고 싶다. 911 GT3 투어링 패키지는 우리가 오래도록 지켜야 할 살아 움직이는 유산이다.


김성환 기자 swkim@autotimes.co.kr